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사람이 있다

Post date: Jul 3, 2016 7:38:14 AM

제대한 후 내가 복학생이었을 때, 우리 과 학생들은 대부분 여자이고 나와는 나이 차이도 제법 나다 보니 편하게 어울릴 사람이 적었다. 그런데 마침 2학년 후배 중에 나와 비슷하게 겉도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를 볼 때면 친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목석같은 나였지만 내심 잘 대해준 것 같다.

내가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그의 마음씨이다. 나를 보면 웃으면서 인사를 먼저 건네었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내가 과대표를 하면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많이 챙겼던 같은 학년 학생들도 그 아이처럼 인사를 잘 하는 법이 없었다. 학과 선후배라는 것이 그저 어떤 행사가 있을 때나 아쉬울 때만 필요하다 여기는 것 같아 참 서운했다.

내가 새내기였을 때는 선배님들이 술을 자주 사 주셨는데, 나는 그분들한테 너무 많이 얻어 먹다보니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어떻게 갚을 도리가 있겠느냐고 물어보면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너도 나중에 후배들한테 잘 해라’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인연에 대해서 너무 깊게 파고든 탓이었는지 모른다. 적당한 거리라는 건 예측하기 어려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그 많은 여자 후배들 중에 내가 누구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마 내가 아끼던 후배들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는 학과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후배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마치 내가 자기와 같은 세계에 놓인 사람이란 것을 알았는지 상냥하게 접근해온 것이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내 생각에 대해서 그 아이에게 늘어놓기도 했다. 그것들이 분명 따분한 이야기였을 텐데 내게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아이도 나와 같았을지 모른다. 그가 말문을 터놓는 사람도 드물었던 것 같다. 일회용 화제나 지껄여가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우리는 깊은 내면을 나누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서로가 가진 고민들과 미래의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속사정들에는 서로의 약점과 상처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어서 그나마 친했던 사이라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 아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가난했다. 집안 형편도 그렇지만, 자기가 학비도 겨우 벌어다 쓰는 데다가 가끔 집에 들러 농사도 도와야했다. 그런데 더 걱정인 것은 1학기까지만 하고 입영을 해야 한다는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일손이 부족해서 몸이 불편한 부모님이 고생하실까봐 걱정된다고 하였다. 더구나 그 아이가 막내인 데다가 누나들이 모두 시집을 갔기 때문에 이제 노부모 곁에는 자기밖에 없다고 했다. 사정이 참 딱하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선함이 내 마음 한구석까지 따뜻하게 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그 아이는 씩씩거리며 머리를 깎고 대뜸 내 앞에 나타나서는, “해군으로 갑니다. 전화하면 잘 받아줄 거죠?”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했다.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우리는 머지않아 볼 것이니까 바깥일 걱정하지 말고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그랬다.

그 아이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나는 학원에서 잠시 일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교무실에 두고 강의를 하러 갔는데, 어느 날 부재 중 전화가 빗발쳐 있었다. 나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말했다시피 그 아이는 해군이라서 내가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전화를 놓치고 나서는 한동안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는 내 군 생활을 생각하며 이제 바쁜 시기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군대에서는 정기적인 검열이나 훈련이 있기 때문에 보름은 거뜬히 외부 사람을 잊을 수 있다. 아마 그런 생각으로 그해 여름을 보낸 듯하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 과방에 가 보니, 조문을 하고 왔다는 후배가 있었다. 2학년 남학생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애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내 불길한 예감은 되돌아온 답변에 의해 사실이 되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 다시는 볼 수 없는 것, 끝내 후회하고 말 것이 되었다.

나는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두어 달 전에 내 마음 가장 가까이에 다가와서 말벗이 되어준 그 아이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슬픔이 과한 탓인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을 안고서 한 학기 동안 멍하니 지냈다.

그 당시에도 군대에서의 구타가 문제가 되었다. 그때 그 부대에서는 그런 사실이 밖으로 알려질까 봐 쉬쉬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몸에 멍이 든 채로 그 아이는 목 매어 자살한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죽음을 결정하게 된 원인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마 평소에도 많은 것이 그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스스로 숨을 거두었지만, 목을 조른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그 아이의 웃음과 눈물을 기억한다. 왜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나 역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이렇듯 마음을 쿡쿡 찌르는 걸까. 비록 그 아이는 삶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떠나버렸지만, 내게는 그가 아직도 참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그 아이의 사진도 한 장 가지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의 맑은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 ‘내가 너를 보내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웃어다오.’

선배 하면 정나미 없다며

행님 하고 불렀지

행님 아니면 누굴 찾느냐 해서

내 동생 하기로 했지

머리카락 깎겠다며 씩씩거리던 날

건강하란 내 말도 너는 삼키고

어느 바다에 목 매 힘겹게 숨 쉬는 거니

일찍 가면 일찍이 오는 곳을

한 번 가더니 오지를 않는구나

ㅡ <목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