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서재

내가 나를 버린 날 2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8   [ 성우넷에 의해 업데이트됨() ]



   내가 나를 버린 날 달무리를 보았다 사랑하라고 더 사랑하라고 빛이 손을 내밀었다 눈물의 꽃은 맑게 시들고 긴 밤이 목청에서 소리 없이 부서졌다 걸음은 빛의 고리에 갇힌다 나의 제자리걸음은 오늘을 지루하게 이어 나가고 무채색 울타리에서 별들은 바람의 소식을 기다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이별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선명한 흙의 향기를 따라 투명한 삶의 조각이 쌓여 가고 밤하늘은 점점 내려앉는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기대고 지친 나를 물의 표면에 가두고 추억의 파동을 일으킨다 추억이 흔들린다 추억처럼 세상이 흔들린다 모든 소리들이 밀려온다 밀려와서 나를 물가에 떠민다 나는 거울처럼 빛나다 어지러운 무늬로 찢기어져 흔들리는 추억 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Photo by ©︎ Sabina Tabakovic

내가 나를 버린 날 1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7   [ 2016. 7. 2. 오후 10:57에 업데이트됨 ]



그렇게 사랑했던 햇살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 삶에도 깊은 그늘이 졌다
희망이 내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고
그 향기를 떨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바다가 나를 부를 때 파도는 채찍처럼 나를 떠밀었다 
거센 바람이 구름을 헤치며 푸르게 살라 한다
아련한 별빛이 밤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빛나게 살라 한다 
삶의 달콤한 줄기에 매달린 쓰디 쓴 열매가
새하얀 눈 속에서 얼어붙었다 
골목의 지친 한숨이 대문을 닫는다 
텃새는 지붕에 날아들어 조금씩
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내 심장은 조금씩 
고개를 들어 분주함을 잊어버리고 있다

Photo by Fstern

분수의 구조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5   [ 2016. 7. 2. 오후 10:56에 업데이트됨 ]



못질로 쌓아올린 구조물에서

항상 그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못질의 속도만큼 빠르게 무너진다
위태로운 무덤을 예술이라고 자랑하던
뇌세포의 줄기들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공포영화의 칼질처럼 죽죽 끊어진다
이별의 인사처럼 뚝뚝 끊어진다
그동안의 모진 땀방울이
화려하게 쌓아올린 허영의 구조는
눈물처럼 하얗게 추락한다
나 한평생 깨달은 것은
내 인내의 높이가 만든 속도이다

Photo by AditChandra

완벽과 절벽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4   [ 2016. 7. 2. 오후 10:54에 업데이트됨 ]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추락하는 이들을 보았네

절벽이 완벽의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늘 조심하게나
꽃을 움켜쥐는 건 급한 일이 아니라네
구름이 천천히 산을 오르는 것도
소나기로 그치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네

Photo by alicethewhale

어린 날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3   [ 2016. 7. 2. 오후 10:53에 업데이트됨 ]



내게 처음

주먹을 날렸던 아이

그리고 가끔

어깨동무를 해준 벗


우리는 초록이 우거진 들에서

하늘빛 종이를 접고 별빛 글을 지었지

나의 외로움을 잊게 한

어린 날, 소꿉동무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내던지고

함께 흠뻑 젖어들던

너의 얼굴

옛 사진처럼 빛바랜 이름

정든 그 손길


실오라기 같은 웃음으로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 친구

노을처럼 눈망울이 그윽한 소년의 긴

긴 강물에서 나는

아직도 잔잔히 흐르네


Photo by 재난기아

그 시절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1   [ 2016. 7. 7. 오후 8:19에 업데이트됨 ]


그 시절 
아버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과메기나 메주처럼
구수하게 엮어
밤새 걸어놓고는 하셨다


그것들은 얄밉게도 
내가 한참을 귀 막은 이야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쌀 한 가마의 전설을 내내 안치고는 하셨다
내가 알사탕을 몰래 녹이는지 모르고


그동안 어머니는 배추 한 단을 절여
포기마다 할머니의 고춧가루를 여기저기
새빨갛게 바르고 또 바르는데
그것은 또 얼마나 매운지 
콧구멍 깊이 고드름이 매달린 양 시리다


나중에 내가 갓 난 강아지처럼 
실금 눈을 뜨고
옆집 소 울음처럼 하품을 늘어놓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며시 그들의 방을 떠난다


Photo by 야생화강서나누리가랑비윤기봉컨트라스황정우소구리하우스희야

집에 가는 길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50   [ 2016. 7. 2. 오후 10:50에 업데이트됨 ]



집에 가면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는데
왜 내 발걸음은 가벼울까
집으로 가면
아빠가 공부하라고 잔소린데
왜 나는 콧노래를 부를까

집에 가면 엄마는 또 
시래기국을 내어올 텐데
왜 나는 엄마가 보고 싶을까
집으로 가면 아빠는 또
반찬 투정한다고 나무라는데
왜 나는 아빠가 든든할까

누룽지가 된 엄마 속도 모르고
연탄처럼 그을린 아빠 뒷모습도 모르고
마냥 즐겁게 집으로 
집으로 향하던 나는
아직도 그때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네


Photo by ccboy11

신경질의 역사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26   [ 2016. 7. 2. 오후 10:26에 업데이트됨 ]



인내의 나이 열두 살

마틸다의 세례명은 마르가리따

못 이룬 사랑의 길에서

침묵의 나이 마흔 살

레옹을 만나 신경질의 역사를 쓴다


1996년, 가슴을 풀어헤친 레옹이

설렘으로 우거진 VIP석에 마틸다를 초대하자

그녀의 길은 펑크 록으로 귀가 막힌다

그해 올림픽 공원의 바람은 

레옹에게 열다섯 해의 인내를 선물한다


2005년, 마틸다가 자매결연으로 

섹시 호텔방의 B석에 스팅을 초대하자

그는 그녀의 신경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었고 그녀는 너무도 쉽게 그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바람의 숲을 떠난 레옹을 떠올린다


2011년, 마틸다는 귀가 뻥 뚫린 지하철을 탄다

바람이 새지 않는 방수 가방에 맥주 한 캔을 담는다 

그리고 레옹이 디딘 인내의 길을 따라 숨 가쁘게 달린다

그를 보던 색안경, 제 신경질을 담아내던 사진기가  

맥주의 깊은 바다 속에 잠기어가는 줄 모르고


Photo by lopolove

달빛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23   [ 2016. 7. 2. 오후 10:23에 업데이트됨 ]



까마귀의 날갯짓마다 사라진 깃털 하나하나

샛노랗게 영근 귤 한 조각의 즙처럼 
빈 항아리 가득 환하게 담기네
밤의 옷을 입은 채 낮을 등진 하얀 토끼처럼
여인의 감추어진 눈물방울처럼 
희미해져 가는 길 
그것들은 뒷모습을 보이지 않네 
어머니의 품처럼 둥글게 자라 오르네
호수의 은빛비늘이 절망의 늪을 감싸듯이
살며시 번지네
긴 세월 속에 스며든 나그네의 숨결이 
흐릿한 얼굴에 피는 물결무늬 달무리처럼 
주렁주렁 미소 짓는 달맞이꽃처럼 
살금살금 번지네
이글루의 얼음지붕마다
풋사랑이 익어가는 푸른 사과마다
여린 풀잎마다 시린 가지마다 
그리움이 내린 작은 달 속 분화구들
천천히 자리 잡은 눈부처처럼
달빛에 잠긴 새소리처럼
하얗게 녹아내리네
하염없이 부서지지 않으면 내일로 이를 수 없는 정령들이 모여 
이 밤을 노래하네, 곱게 두드리네 
깨알 같은 숨소리들이 쌓아올린 쪽빛 피라미드 
그 한가운데를 열어낸 항아의 창가에서

Photo by SLEEC Photos

사막의 밤

게시자: 허성우, 2016. 7. 2. 오후 10:21   [ 2016. 7. 2. 오후 10:21에 업데이트됨 ]


그대는 나와 한여름의 불길을 걷고 있네
희미한 바람의 줄기를 따라
겹겹이 쌓인 황혼의 지평선을 걷고 있네
카타르시스의 눈물은 한때 억수같이 내리다가
가시 돋은 선인장 속에 갇히고
다시 모래지옥에 스러지고
사라진 우주는 황토의 장막 아래
그리고 별빛의 소나기 속에
안개처럼 서리어 있네
해를 삼킨 지상의 하늘빛은 끝없는 밤을 노래하고
우리는 낙타를 따라 긴긴 사막을 걷고 있네


낙타는 여우의 그리움을 싣고 떠나네
박쥐는 도마뱀의 갈증을 안고 떠나네
하이에나는 전갈의 독을 품고 떠나네
부엉이는 독수리의 허기를 느껴 떠나네
살쾡이는 풍뎅이의 악취를 피해 떠나네
고슴도치는 선인장의 아픔을 닮아 떠나네
모래고양이는 가젤의 놀람에 덩달아 떠나네


사소한 가슴 떨림으로 
우리는 고운 모래언덕에 
쓰러질 나무가 되지 않으리
무너질 성을 쌓아두지 않으리


모든 수난의 그림자는 
사랑의 눈에서 물결치고 
눈물 언저리에서 반짝이고
설교의 길을 따르는 어둠은
시시포스의 내일을 따라 
황설탕 같은 은하수로 흐르네


Painting by 귀스타브 아쉴 기요메 <사하라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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