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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흘린 피의 흔적

게시자: 허성우, 2016. 2. 3. 오전 4:14   [ 2016. 2. 4. 오전 8:49에 업데이트됨 ]





인생에는 우연과 운명의 소용돌이가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몰아친다. 설마 하는 일이 현실이 되어 삶의 많은 부분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소설 <눈 속에 흘린 피의 흔적>에서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아름다운 여인 네나 다콘테는 우연히 빌리 산체스를 만나서 싸우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나아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다콘테는 신혼 첫날밤 하얀 눈 속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 선물 받은 장미꽃다발의 가시에 찔려서 서서히 시들어갔던 것이다. 그러한 운명은 산체스가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일까.


두 주인공들이 뿌리치지 못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두 사람을 단절시켜 놓은 파리의 관습과 법규들이 자신이 살던 마드리드와 많이 달랐기에 심지어 대사관에서조차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산체스는 돈으로 사회와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없었다. 그저 걱정만 하면서 의사와 약속한 날짜까지 기다려야 하는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다콘테를 만나려고 애를 썼지만, 오히려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만이 그녀의 장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카뮈의 말대로 산체스는 우연한 사실성에 의해 ‘반항적 인간’으로 변했다. 그는 그를 둘러싼 부조리한 상황들 때문에 점점 불안해져갔다. 그녀를 사랑해서 행한 그의 행동들이 오히려 그녀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아내의 죽음을 대함으로써 산체스는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하는 삶의 비극과 모순을 모조리 떠안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산체스의 잘못은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그의 입장에 놓였더라도 응당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걱정이 되어서 무슨 수라도 써보려 했을 것이다. 조용히 시간만 보내었다면 산체스는 오히려 인간적이지 못한 인물로 그려졌을 것이고, 독자들에게도 냉정한 인물로 다가섰을 것이다. 


우리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살아간다. 그러나 늘 시시포스처럼 인내하고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이것이 인간인 우리가 사회제도와 운명에 맞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다. 운명의 돌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 우리의 길을 막아버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숙명의 순간까지도 극복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에게 얼마나 무거운 돌이 떨어져 내리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맞서본 삶의 과정이다. 그러한 경험을 밑거름으로 하여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세상을 일구어 나가기 때문이다.


사진 Anos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