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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바다

게시자: 허성우, 2016. 2. 3. 오전 4:16   [ 2016. 2. 4. 오전 8:48에 업데이트됨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사람의 꿈, 소설 속의 환상은 이성적 상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사가 천재들을 유리병 속에 가둔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기적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된 이성주의가 우리의 눈을 어둠으로 가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마술적 사실 세계를 구축하여 1960대 세계 문학계를 ‘소설의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어둠의 바다로부터 건져 올린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들의 꿈들이 작가의 손에 의해 우리 본연의 심성과 사실적으로 교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2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떠안는다. 그 스스로도 커다란 시대의 꿈을 건져 올린 영웅이 된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부자인 허버트도 배고픔 앞에서는 가난하여 굶주린 자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먹을 것을 찾기 위해 토비아스와 허버트는 바다 깊숙이 들어간다. 그때 토비아스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목격한다. 꿈을 찾아 떠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후 바다 속에서 쓰레기처럼 떠다니지만, 끝까지 장미 향기의 계시를 믿던 야곱의 아내는 오십 년이나 젊어진 여인이 되어 꽃들과 떠다니고 있었다. 죽을 때가 와서 죽는 사람과 죽기 원할 때 죽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그곳의 풍경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요란한 방귀소리를 내던 폭풍이 잠잠해지고 게들이 더 이상 토비아스를 괴롭히지 않는 아침이 오기까지 그는 잠을 자지 못한다. 다시 바다로부터 장미 향기가 오지 않을 것이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을을 떠나라는 허버트의 말을 토비아스는 밤새 되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 속에서 본 수백만 개의 꽃을 가진 흰 집을 내내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거북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소설 속에서 그려진 환상들은 허구의 탈을 쓴 진실들이다.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지만 결국 그 돈을 꿈을 위해 쓰지도 못한다. 대개는 꿈을 이룰 만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실패를 맛보거나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모두 잃어버린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우리의 삶은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언젠가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었든 지금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을 다시 바다가 토해내듯,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도 장미 향기처럼 다가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그립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죽음마저 삼켜버린 바다가 완성되지 못한 꿈과 존재의 흔적까지도 다시 가져다주길 소망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꿈을 위해 창녀가 되기도 하고, 도박을 하다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반면 꿈을 간직한 어떤 죽음은 다시 그 영혼을 아름답게 지켜주기도 한다. 인생이란 장미의 가시처럼 따갑고 쓰라리지만, 절연되지 않은 꿈은 죽음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지닌 채 피어난다.

 

 

소설 <읽어버린 시간의 바다>를 읽고

사진 Aristocrats-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