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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께서 빨래를 걷느라 분주하시다. 나는 얼른 나가 어머니께서 들고 계신 빨래를 덥석 받아가지고 방안에 던져 놓았다.
“오빠, 눈오는 것 좀 봐!”
동생의 목소리다. 조금 전에는 비가 온다고 야단법석이더니 이제는 눈타령이다. 하긴 나도 제 나이였을 때에는 저렇게 했었다. 강아지처럼 온 들판을 뛰어 다니면서 고함도 질러댔다.
“할머니, 눈오는 것 좀 보세요!”
그러면서 할머니와 같이 장독 뚜껑 위에 쌓인 눈을 한줌 쥐어 둥글게 만들고는 마당에 데구르르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때 할머니께서 내 손이 동상에 걸릴까봐 걱정하시며 작은 두 손을 호호 불어주시던 생각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오빠, 우리 이 눈으로 눈싸움하자.”
“해봤자 네가 질텐데 손 시리게 왜 하니?”
그랬더니 동생은 시무룩해지며 이내 어디로 가버린다. 나는 내가 못할 말을 했는지 되새겨 보았으나 그런 점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뒤, 집 모퉁이에서 동생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눈 뭉치를 내게 던져왔다. 나는 신나게 얻어맞은 후 항복하고 말았다. 아마 조금 전 내가 한 말에 복수를 한 것 같다.
눈은 계속 쌓여갔다. 소복한 흰 눈 위를 내가 제일 먼저 걸으려고 밖에 나갔다. 그랬더니 밖엔 아버지께서 우뚝 서 계셨고, 그 옆에는 커다란 눈 뭉치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눈을 깨끗이 쓸어 버리셨던 것이다. 마당이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은 내게 한마디의 변명으로 들렸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 다시 방안에 들어왔다. 밖에서 너무 실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있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구름은 다 걷히고 밤하늘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나는 혼자 별을 바라보다 잠이 들어 버렸다.
2
아침에 눈을 뜨니 이불 속에 있었다.
아마 어젯밤 책상에서 잠든 나를 어머니께서 옮겨 놓으신 것 같다. 나는 하품을 쩍 하며 눈꼽이 낀 채로 밥상에 앉았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뭐라고 한참 나무라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얼굴에 찬물을 듬뿍 끼얹고 다시 밥상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 밥맛은 이상하게도 전과 달랐다. 꿀맛이었다.
형은 오늘 아침은 바쁘다며 빨리 학교에 가자고 한다. 나는 매일 형과 같이 등교하므로 형이 학교를 가자면 나도 빨리 준비에 따라간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거울을 한번 쳐다본 다음 책가방을 들고 안방에 간다. 이런 저런 핑계로 용돈을 받고 나면 정중히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현관을 나선다. 형은 그런 나의 모습이 못마땅한지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간다. 추운 아침거리를 걷는 형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벌개져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의 모습을 보고 웃었더니, 형은 쏘아보면서 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형을 따라가려니 숨이 찼다. 하지만 나도 뒤질 수 없다는 듯 빨리 뛰어갔다. 그때 갑자기 발 밑이 미끈하더니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형은 없었다. 아마 먼저 간 모양이다.
나는 아픈 엉덩이를 어루만지면서 다시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저려왔다. 괜히 뛰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자꾸 맴돈다.
학교를 갔다온 나는 어머니께 약을 좀 살살 바르실 수 없냐고 고함을 질러댔다. 옆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나를 쳐다보시며 어제 마당을 쓴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고 큰소리 치신다. 약을 바른 나는 내 방으로 와서 바닥에 벌렁 누웠다. 엉덩이가 또 쑤셔왔다. 나는 고통을 참느라고 애썼다. 그러다가 잠들고 말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창문을 열어보니 또 눈이 마당 위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나는 엉덩이를 움켜쥐고 밖에 나가 그 눈을 비로 깨끗이 쓸어 버렸다. 속이 후련했다.
아버지께서 집에서 나오시더니, 나를 보고 허허 웃으신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모아 큰 눈사람을 만들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만들었던 것보다 못생겼는데도 동생은 잘 만들었다고 야단이다.
눈, 코, 입 모두가 비뚤어진 눈사람이 뭐가 좋냐며 한 방 쥐어박았더니, 얼굴이 날아가 버렸다. 아까보다 더 후련했다. 내가 큰소리로 웃었더니, 동생이 나를 흘겨보며 다시 흘겨보며 다시 눈을 모았다. 그리고는 금세 얼굴 하나를 만들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붙였다. 나는 말괄량이 동생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눈이란 좋은 것일까?’
오늘밤도 나는 창밖에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그 하얀 눈사람을 보았다. 그 하얗고 못난 눈사람을 말이다. 그 눈사람은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눈사람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달려가도 제자리였기 때문이다.
3
다음날 아침에 밖으로 나가보니, 그 눈사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물만 고여 있었다. 나는 눈사람이 사라진 곳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큰 눈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다니…….
나는 어제만 해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눈이 이제는 그리워졌다. 고개를 돌려 하늘에 떠 있는 해를 쳐다보았다. 아주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나는 이때까지 해가 저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추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방안에 있던 동생이 뛰어 나오더니 눈사람이 다 녹았다며 투정을 부렸다. 그리고 해를 쳐다보며 못마땅해했다.
나는 눈이 오는 날도 좋지만 눈이 오고 난 다음날 아침도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따스한 아침햇살 아래서 만물이 생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이 조깅을 하러 밖에 나왔다. 그리고 강아지들도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따라 다녔다. 참으로 경쾌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산에 올라가 보자. 뭐니뭐니 해도 상쾌한 아침 공기가 최고야!”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또 어제처럼 미끄러지면 어떡해요? 아직 거긴 눈도 다 녹지 않았을 텐데…….”
내가 대꾸했다.
“인석아, 따라 오라면 따라와!”
“피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훨씬 상쾌했다. 나는 올라가면서 몇 번씩이나 발 밑을 살폈다. 혹시 얼음이 남아 있나 해서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옹달샘이 하나 보였다. 약수터 같지는 않았다. 나는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바위에는 온통 고드름이 달려 보기 좋았으나 물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나는 살며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갔다.
“아버지, 저 물 먹어도 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네 입천장에도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릴게다. 먹어봐.”
하시면서 겁을 주었다. 그리고는 나보다 먼저 그 물을 들이키시고는
“어이, 시원하다.”
하시며 체조를 하셨다. 나는 멀뚱멀뚱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샘물을 마셨다. 정말 상쾌했다. 다른 한편으론 달콤하기까지 했다.
“이젠 여름에 땀 좀 적에 흘리겠구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눈물을 먹으면 땀을 적게 흘린다는 말이 있지.”
아버지께서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말씀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 말씀이 정말일까? 눈물을 먹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집에 돌아온 나는 뒤늦게 아침식사를 했다. 배가 고팠으므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얘야, 넌 자는 것밖에 모르니?”
어머니께서 잠든 나를 깨우셨다. 그리고 꿀물을 타 가지고 오셨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꿀물을 조금 마셨더니, 온몸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어보니, 형과 동생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처음엔 자꾸 떨어졌으나 조금 있으니 높이 떠올랐다.
“와아, 연이 떴다, 떴어!”
동생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연이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형이 실을 더 풀자, 연은 먼 하늘에서 가물가물 움직이며 춤추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살이 연 주위를 스쳐갔다. 정말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순간 내 눈앞에 어제 만든 그 눈사람이 보였다. 아주 희망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내 하늘 높이 사라져 버렸다.
4
“안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 밖에 나가보니 마당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 있었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꿈속의 겨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더 이상 겨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겨울은 그 눈사람과 함께 떠나버렸다. 찬란한 햇살만이 내 눈망울을 살며시 스쳐갔다. 달력에는 ‘입춘’이란 포근한 글자가 파아란 하품을 하고 있었다. ♣
동화, 1993년 作